"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장 28절
고린도 후서 4장에 바울이 고백하는 직분을 대하는 선언이 있습니다.
"이 직분을 받아 긍휼 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상합니다. 직분을 받았는데 즐거움과 기쁨이 넘치는 것이 아니라
낙심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낙심 할 이유와 상황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만사형통과 '복'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한국은 역사적인 아픔으로 인해 '복'에 한이 맺혔던 민족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많은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복'을 받을수록
'복'만 바라는 신앙이 되어 버렸습니다. '복'에 중독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묵상하면 복에 대한 이야기보다 고난의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아브라함의 삶도 떠돌아다니는 고난이였고, 그 믿음 좋은 다윗은 사울을 피해 광야에서 도피 생활을 하였습니다. 심지어 다른 나라로 도망가서 미친척하고는 살아남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결과로 늘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대부분 순교하였습니다.
성경은 '복'이 아닌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우리가 기대하는 '복'과 성경의 '복'이 다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 자신이 거룩하고 경건한 대단한 바리새인이 아닌
질 그릇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가 보배이기에
보배를 품은 질 그릇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것이였습니다.
하나님은 질 그릇 같은 우리의 인생에 '보배'를 담으시는 분입니다.
질 그릇이 보배를 담는 것 자체가 고난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고난은 은혜로부터 오는 고난입니다. 우리가 질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오랜시간 고난을 부정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도 고난이 닥치면 "내가 신앙 생활을 잘못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에 빠집니다.
인생에 고난은 반드시 옵니다. 보배가 없어서 오는 고난과 보배로 인해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동일한 고난이지만 결과가 달라집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보배 없는 질 그릇이 되지 마시고. 보배를 품은 질 그릇이 되어
고난 중에 은혜를 발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