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장 28절
예수님은 다양한 천국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때로는 품 꾼을 구하러 나간 포도원 주인으로, 때로는 달란트를 맡기는 왕으로, 때로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주는 선한 왕으로 말씀합니다.
특히 용서와 관련된 천국 비유는 마태복음 18장의 일만 달란트 비유입니다.
마태복음 18장은 베드로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천국에서 누가 큰 자입니까?"
제자들 사이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우리들 중
'누가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였습니다.
가롯유다와 베드로의 다툼이 심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화를 삭히지 못한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중간에 세우시고 말씀합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이다."
육체적인 어린 아이가 아니라 자기를 낮추는 사람을 말씀하십니다.
그런 대화를 지나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는 신하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왕이 결산의 때가 되어서 신하들을 모읍니다.
그 중에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신하가 있었습니다.
그 신하는 엎드려 빌고, 왕은 그를 불쌍히 여겨 빚을 탕감해 줍니다.
이제 그 신하는 가장 큰 은혜를 받는 신하가 되었습니다.
갚을 수 없는 큰 금액인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는 신하는
나가는 길에 자신에게 백 데리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게 되고
용서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결산의 날이 된 것도 아니였습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은혜의 사람이 결국 '악한 종'이 되어 버렸습니다.
왕은 신하를 불쌍히 여겼지만, 신하는 동료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일만 달란트나 탕감 받았으면서, 6000분의 1에 불과한 백 데라리온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일까요.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은혜를 자신의 삶으로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용서 받았기에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도덕적인 수준이 높아져서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성품이 좋아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 믿어도 고집스럽고 욕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일만 달란트의 은혜를 받았기에
백데라리온을 능히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 입니다.
은혜를 자격으로 착각하면 교만이 됩니다.
왕은 신하의 치적을 감안해서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단 하나의 이유입니다. 불쌍하게 보았습니다.
은혜는 값 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격이 아닙니다.
왕의 사랑이며 긍휼이며 자비입니다.
거룩하고 경건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잃지 않기 위해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나의 자격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성도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나의 십자가인 것을 알아야
진짜 사랑하게 되고 용서하게 됩니다.
받은 은혜와 내가 나누어야 하는 은혜를 분리하지 마십시오.
내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받은 일만 달란트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 은혜 안에 거하는 교회와 성도가 진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