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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월요일 / 양과 염소 / 마태복음 25장 31 - 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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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태환목사
댓글 0건 조회 657회 작성일 22-04-12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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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마지막 강해의 주된 내용은 역시나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하시는것일까요?

본문을 통해 ‘당황함’에 대해서 나누려고 합니다. 

이 비유를 묵상하며 문득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이 양인줄 몰랐던 이들과, 자신이 염소가 될줄 몰랐던 이들의 당혹감은 그들의 대답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좋은 말씀은 다 자신에게 적용하는 우리는, 말씀앞에 스스로의 솔직한 모습을 보지 못할때가 많습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말씀 앞에서도, “다 그런 것은 아니지!”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눈의 티는 보면서 자신의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앞에서도 

"설마 내 눈은 아니지. ‘티’는 있을 것 같애" 라고 생각하면서, 은연중에 의인 되어 버린다.

 

나는 죄인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임을 스스로 인정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회개는 거듭남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 비유에서 먼저 당황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되는 이들입니다. 

임금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하시는 말은 한 마디로 "너희들 믿음으로 참 잘살았다." 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당황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산 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겸손일까요? 속으로는 "정말 믿음으로 산다고 힘들었습니다."라고 생각하면서 겉으로 겸손을 말한걸까요?

아닙니다. 기억이 안 난다는 말합니다. 왜 기억이 안 날까요?  예수님은 기억하시는데? 


우리의 기억을 한번 더듬어 봅시다. 어떤 일이 기억이 안나고 어떤 일이 기억이 선명한가요?

당연한 일들은 대부분 잊혀지고 '특별한' 일은 기억에 남습니다. 특별한 일은 대부분 나의 의지와 상관이 일어난 일이거나 혹은 혹은 그 반대입니다. 

평소와 다른 계획과 의도를 가지고 행한 일들입니다. 그 특별한 일에는 좋은 일도 있고 나쁜일도 있습니다. 


아주 맛 있었던 음식도 기억에 남지만, 정말 맛 없었던 음식도 기억에 남습니다. 

아주 즐거웠던 일들도, 반대로 불쾌했던 일들도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다는 말씀을 하시는걸까요? 


자신의 선한 일들이 기억이 나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 이유는 특별한 의도로 행한 것이 아니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기에 자랑할 것도 없고, 

그래서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선을 행하려는 특별한 의도가 아닌 변화된 그의 삶이였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거듭났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자신의 마음이 된 이들이 상속을 받게 됩니다. 


이런 말을 하면 심각해 지는 분들이 있습니다. 걱정이 많아질 것입니다. 

나는 불완전한데. 그래서 죄인임을 늘 깨닫게 되는데 어떻하나? 

말씀대로 산다고 해놓고는 늘 유혹과 시험에 넘어지는데, 나는 천국에 못가는 것일까?

믿음의 결단을 해놓고는 늘 흐지부지 지나가 버리는데... 

심지어 선하게 사는 것을 미련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아지는 세상입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까요? 

그 정도의 사랑이 아니면 우리가 변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이긴 사랑을 우리가 받았음을 깨달아야 믿음으로 삶이 변하게 됩니다. 


/ 제가 다닌 대구남산국민학교는 체조로 유명했습니다. 

늘 강대상 문을 활짝 열어놓고 연습을 했는데, 어릴 때 너무 신기해서 친구들과 종종 구경을 했습니다. 

그 중에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것이 ‘평균대’였는데, 어린 내눈에는 서커스처럼 보였습니다.

그 좁은 나무위에서 공중회전을 하는것을 보면 정말 신기했습니다. 

 

어떻게 연습하는가 하면, 처음에는 바닥에 평균대 굵기의 흰테이핑을 하고 그 선을 밟고 앞회전 뒤회전을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나면 평균대에 오르는데 낮은 평균대입니다. 떨어져도 크게 다치지 않는 낮은 평균대에서 시작을 합니다. 

넓이도 조금 더 넓고, 옆에는 코치가 딱 붙어서 떨어지려고 하면 잡아줍니다. 크게 다치지 않게 도와줍니다. 코치를 믿어야 안 다 칩니다. 

종종 중학생들이 와서 연습을 했는데, 코치가 없어도 잘 합니다. 

어떻게? 얼마나 떨어지고 얼마나 다쳤겠습니까? 셀수 없을만큼 그 위에서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선생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에 의지하여 좁은 믿음의 평균대에 도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도 좁은길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떨어질때도 있고, 게으를 때는 혼도나고, 도망치기도 하고. 


5학년때 우리반 여자 아이가 소년체전 나가서 동메달을 땄습니다. 당시는 티비에서 시상을 하지 않았기에 

반에서 시상을 한번 더 했는데, 그때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라고 하셨습니다. 

“균형대가 너무 좁아서 무섭지 않냐?”라는 초딩스러운 질문을 누군가 했습니다.

그 때 그 아이의 대답이 “지금은 좁게 느껴지지 않는다.무섭지도 않다.”

우리가 보기에는 좁지만 선수에게는 충분하였습니다. 


신학교 시절 십자가의 은혜를 너무 가볍게 생각한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저절로 천국가는 줄 알았습니다.

당연히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이루는 삶의 과정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모를때는 '쉽다고' 말할수 있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는 그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죽었는지 모릅니다.

생명을 걸어야 하는 그 길이 쉬운길이라구요?  

그 길을 먼저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면, 그 가치를 알게 되면 눈물이 나고, 애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된 내가 나중된자를 향하여 가고 있고, 티 정도만 있을줄 알았던 나의 눈이 장님이 되어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믿음이라는 평균대 위에서 굴러 떨어지고 다치고 실망하고, 그래서 도망치고 싶을때도 있지만, 결국에는 멋진 연기를 완성시키는 것이 믿음입니다. 

일반인들은 넓은 세상에서도 누리지 못하는 기쁨과 평안과 자유를 그 좁은 곳에서 펼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올림픽 금메달을 딴 외국선수가 “나는 평균대 위에 있을때에 가장 행복하다.” 라고 인터뷰를 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좁지만 그는 그 위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노라 고백합니다. 

믿음의 삶을 조롱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맘껏 즐기지 못하고, 무엇인가에 얽매여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미련하다 말합니다. 

그럴때에 믿음의 사람은 이렇게 말할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너보다 좁은 곳에서 너보다 더 많은 자유와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주와 선생되신 예수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죄에서 자유를 누리고, 말씀으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염소 된 자들의 당황함을 보아야 합니다.

먼저 생각해야 하는것은 '그들은 악한 자들이였을까?'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죄를 들켰다면 그들은 임금의 지적에 반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항변은 그들이 자신의 삶에 대한 평가를 받아들일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우리는 염소의 의견을 깊이있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들은 당당하게 말합니다. 


"우리가 언제 당신을 돌아보지 않았습니까? 언제 우리가 당신을 외면했습니까?"


그들은 분명히 선한 행동을 한 기억이 있다는 것 입니다. 

거짓말이 아닐겁니다. 그런데 왜 임금은, 예수님은 기억하지 못하시는 걸까요?


마태복음 6장 2절의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의 행위를 경고하시면서 말미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상을 다 받았다."


그들에게 선한 일을 행하는것은 특별한 일이였습니다. 보여주기 위해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였습니다. 

삶이 변화된 것도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것도 아니며, 구별된 자신을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의'는 자신들이 영광을 누림으로 이미 상을 받았고, 예수님은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벧전5장 2절 “너희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여,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자신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며 본을 보이는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6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 겸손하라. 때가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7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겸손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합니다. 그러한 삶에는 염려가 생깁니다. 

근심과 걱정이 생기지요. 하지만 그것을 주께 맡기고, 맡은 바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염소로 분류된 자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는 선을 행한 기억이 분명히 습니다. 

그래서 반발합니다. 그들이 당황하는 이유입니다. 

선한 일이 특별함이 되는 이들은 ‘지극히 작은자’들에게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드러낼 기회와 이유가 있을뿐입니다. 


작은자는 어린아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약한자. 부족한자. 건강해 보이지만 그 속은 근심으로 살아가는 자. 부유하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 

선줄로 알지만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자들. 그들 모두가 약한자이며, 이웃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특별함으로 선을 행할 때, 자신의 머릿속에는 기억되지만 예수님은 잊어버리십니다. 


오래전에 보았던 박누가 선교사님의 마지막 임종 영상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그들을 도와준게 아니라 그들로 인해 내가 행복했다. 감사하다.”


자신도 암에 걸려서 투병하면서도 단 한사람을 더 살리기 위해 필리핀의 가난한 자들을 향해 달려가는 그의 모습은. 

예수님을 닮은 모습이였습니다. 아마 그 분은 자신이 살린 이들이 누군인지 일일이 기억하지 못할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남들이 보기에는 미련하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좁아 보이는 평균대위의 삶처럼 보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선생되시기 때문에, 

박누가 선교사님과 같은 분들의 삶은 누구보다 자유로웠고, 어떤 건강한 사람도 할수 없었던, 어떤 부자도 할수 없었던 일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양이 되어가고 있습니까? 


몇 번 떨어지고는 포기하셨습니까? 

좁아 보이지만 예수님과 함께 하면 넓어지는 그 균형대 위에 다시 올라가 봅시다. 

우리가 그 위에서 자유를 얻을 때에, 누군가의 희망이 되고, 빛이되고, 소금이 될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성도가 됩시다. 


"너희들 보기에는 좁지만 우린 이 길에서 너희가 상상도 할수 없는 기쁨과 은혜를 누리며 살고있다!"


그런 교회와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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