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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3장 침묵하는 완악함을 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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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태환목사
댓글 0건 조회 363회 작성일 21-06-03 19:30

본문

2천년 기독교 역사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임재는 모든 나라에 경험되어졌습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한국이라는 나라를 변화시킨 것처럼 미국도 성령운동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위대한 리더들이 등장했고, 예수 그리스도는 경험되어 졌습니다. 

성령의 체험은 예수님과의 적극적인 대화의 참여에서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대체로 말을 많이 하면 ‘득’보다는 ‘실’이 많습니다. 

말을 많이 하다보면, 대화의 주도권을 가지려 하다보면 ‘과장’되고, 흥미를 위해 ‘각색’됩니다. 

동일한 사건을 시간차를 두고 이야기하면 조금씩 달라집니다. 

그리고 감정이 남아있을때와 감정이 사라졌을때의 이야기가 또 달라집니다. 

그래서 쉽게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가 시간을 두고 대화하면 의외로 쉽게 해결될때가 있습니다.  

말한마디로 천냥빛을 갚는다는 말은, 똑같은 상황도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상대방이 

다르게 받아들일수 있다는 말입니다. 말을 지혜롭게 하는 것은 아주 유익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침묵이 아주 좋은 화술의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말이 적다는 이유로 

신중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침묵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도 말을 많이 하는 성격이 아닙니다. 

사적인 대화는 특히 많이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가 스스로 실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실을 외면하기 위해 사용되는 침묵은 죄가 됩니다. 

평소에는 말을 잘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혹은 ‘불이익’이 두려워 진실에 침묵할때가 많습니다.  


진리에 침묵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쉬운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것과 악을 행하는 것’ 더 나아가 ‘생명을 구하는것과 죽이는 것’ 무엇이 

옳은 가를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자주 겪게 되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그들과의 대화를 시도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지키는 안식일의 잘못된 것을 

올바로 잡아주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침묵합니다. 


제가 어릴적 주일은 철저한 ‘안식일’ 이였습니다. 

저와 비슷한 연배의 성도들은 주일에 돈을 쓰면 안된다는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주일 간식도 주중에 다 준비를 해야 합니다. 주일 식사준비도 토요일에 다 해야 합니다.  

어느 권사님은 주일에 버스를 타는 것도 안식일을 어기는 것이라 하여, 예배 1시간전에 집에서 

걸어서 교회를 오셨습니다. 제가 속한 장로교는 그렇게까지는 아니지만, ‘거룩’이라는 단어의 파생효과는 

대단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안식일을 철저히 지킵니다. 

엘리베이트 단추를 누르는 것조차 안식일을 범하는것이기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타서, 층수를 눌러 달라고 

한다고 합니다. 자신들이 직접하지 않으면 거룩은 지켜지는 것입니다. 


참된 거룩은 마음을 채우고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거룩은 마음에서 나와 행위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거룩은 내적인 상태의 경건이, 외적인 행동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누구나 거룩과 경건을 생각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생각에 머물러 있으면 

삶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모든 내적인 상태는 외적으로 드러날때에 완성되어지고 정의되어집니다. 

즐겁고 기쁜 생각, 정직한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하지만 정직하게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정직한줄 알았는데 부정한 이들이 있습니다. 

왜 그들의 정직은 거짓이 되었을까요? 그런 사람들도 입으로는 늘 정직을 말합니다. 

왜 가식적인 사람이 되었을까요?


얼마전에 한 연예인의 음주운전 사고가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연예인들 음주사고야 흔하게 접하는것인데, 이번에는 좀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연예인이 예전에 

음주운전에 대해 강한 비판을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거짓말을 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람은 억지로 가식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거룩하고 경건할수 없습니다. 

죄는 우리의 모든 삶을 인질로 삼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할때에 

우리는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내면의 ‘거룩’이 삶으로 드러나는 것이 ‘경건’이라면, 행동을 통해 ‘이익’을 얻는 사람이 

그 이익을 위해 또다른 행동을 하게 될 때에 그것은 ‘가식’이 됩니다. 

경건을 통해 이익을 얻게 되었을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은혜임을 모르고 이익만을 

보게 되면, 타락하게 됩니다. 

가식은 가면과 같습니다. 가면이 웃는 것과 그 안의  표정이 웃는 것은 다릅니다. 

누구나 가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면이 필요할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가면이 

진리를 외면하는 침묵에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면은 우리의 믿음의 걸음을 더디게 하며, 내적 성장을 방해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골방의 기도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솔직하게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사모하십시오. 


예수님이 물으실 때 대답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침묵을 깨뜨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말씀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질 때입니다. 

용기를 내어 대답을 하셔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심은 오로지 사람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양심은 옳고 그름에 용기를 낼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양심을 외면하고 살아가면 무뎌지고, 결국은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반면에 양심을 통해 영적인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수십년 무신론자로 살던이들이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스스로 교회를 찾는 

분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젊을때에 교회를 외면하고 비난하고 비판했던 사람들이 스스로 돌이켜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그들대부분이 “이렇게 살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합니다.  

그 생각은 어디에서 오는것일까요?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음성에 외면하고 침묵하는 것은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는 침묵하던 이가 언젠가는 그 음성에 대답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는 것 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의 침묵보다 더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침묵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렸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침묵합니다. 

어려운 질문이 아니지만,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였습니다,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는 말씀이셨습니다. 정죄가 아닌 잘못을 바로 잡으려는 것이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인정하기 싫었고, 고치기 싫었습니다. 그들은 침묵으로 대신했고, 그 침묵은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이들의 암묵적인 약속이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을 했다면 어쩌면 변화의 기회가 되었을수도 

있었을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고집스러워 침묵할때가 많습니다. 


침묵을 깨뜨리고 기도합시다. 

침묵을 깨뜨리고 손을 듭시다. 

침묵을 깨뜨리고 찬양합시다. 


침묵을 깨뜨리는 자들은 예수님을 더 깊이 있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침묵하는 이들은 예수님과의 대화속에 들어갈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대화에 참여합시다. 참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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