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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장 죄사함의 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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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태환목사
댓글 0건 조회 1,091회 작성일 21-05-25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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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다양하다. 사람도 저마다 다르다. 나라마다 풍습도 다르다. 셀수 없는 다양함이 모여서 사회를 이루고 있다. 다양함은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다양함이 하나의 거대한 문화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나라의 문화를 쉽게 인지할수 있는 것은 나의 익숙함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 다양함 안에는 크고 작은 목적들이 있다. 그러한 목적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이고, 조직이 생겨나며, 프로그램이 생기고, 법이 

생기기도 한다. 모든 사람의 모임에는 목적과 목표가 있다.


목표는 목적을 가진다. 


목표은 방향이고 목적은 가치이다.  

목표안에는 목적이 있다. 삶의 방향이 된다. 작은 목적이라도 목표가 없는 것은 없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목적과 목표가 보인다. 그 목표가 분명할 때, 그 사람의 삶은 서서히 바뀌게 된다. 작은 목표는 삶의 변화을 수반하지 

않을때도 있지만, 큰 목표는 반드시 삶을 바꾸게 된다. 그러한 목적은 직업이 되기도 한다. 목적과 직업이 일치될수 있다면 그보다 행복할수 있을까?

‘그리스도인’은 목적과 목표가 분명한 사람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는 호칭은 가벼운 호칭이 아니다. 우리는 이 호칭의 무게를 

제대로 느끼고 있을까?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죄사함이며,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렇기에 교회의 목표와 가치는 죄사함과 하나님의 나라이여야 

한다. 우리교회의 모습은 그러한가?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죄사함의 은혜를 알고 행할 수 있는 것이 교회다. 모든 교제안에 이 그리스도의 사랑은 경험되어져야 하고, 모든 문제의 해결속에서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해야 한다. 그게 교회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분리될수 없다. 교회의 방향성에 죄사함과 하나님의 나라가 없을 때, 다른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라지고 이 땅의 나라가 차지하게 되고, 죄사함이 아닌 ‘복’이 자리잡게 된다. 축복과 성공이 교회의 목적과 목표가 되어버린다. 그러한 교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교회에는 그에 맞는 목회자가 세워지고 성도들이 모이며, 의외로 부흥하고 성장할때가 많다. 성공을 싫어하고 

복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한국교회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기점으로 새로운 전화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일어난 회개의 운동이였다. 병고침과 부어주시는 은사가 있었다. 폭발적인 부흥이 일어났으며, 귀신과 무속의 나라였던 

이 땅에 교회의 이름이 우뚝 세워지는 사건이였다. 수많은 교회가 세워졌고, 산골짜기 작은 마을에도 ‘기도처’가 생겼고 교회가 되었다. 이 복음은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참된 복음이였다. 그 복음이 흘러 3.1 운동이의 기초가 되었고, 자유를 얻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았고, 이스라엘 민족이 430년의 노예에서 출애굽했듯이, 바벨론 70년의 포로생활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끌어 내셨듯이, 믿음의 사람들은 의심하지 않고 자신들이 볼수 없을지 모르는 나라의 자유를 보았다. 그들은 하나님께 구하였고 순교하였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중에 하나였고, 가난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잃은 백성이였고, 겨우 찾은 나라는 이념의 전쟁으로 온전한 

곳이 없을만큼 철저히 무너졌다. 하지만 한세기가 지나기 전에 6.25의 폐허를 극복하고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섰다. 적어도 삼시세끼 밥먹는데 

100년이 걸릴것이라던 많은 역사학자들의 예상을 뒤엎고, 주목받는 나라가 되었다. 


세계는 대한민국을 ‘한강의 기적’이라 불렀다. 우리는 지금 ‘기적’안에 살고 있다. 그 기적은 죄사함과 하나님의 나라라는 분명한 목적과 목표안에 

구하고 받은 것이다. 수많은 선교사들이 젊은 나이에 이 땅에 묻혔다. 세계의 교회들이 보낸 선교헌금을 통해 학교와 병원과 교회가 세워졌고, 그것은 

이 나라에 주어진 절망속에 핀 작은 희망이되었다. 지금도 많은 대학과 병원에 선교사님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이 나라에 

자신의 생명을 묻기까지 헌신한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찾을수 있다. 

전쟁의 폐허는 새로운 도시가 되었고,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신분의 벽이 복음앞에 무너졌다. 양반이 아니라도 글을 배우게 되었고, 남자가 아니라도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버리워진 아이들을 선교사님들은 시대를 이끌어갈 인재로 키웠다. 그 눈물을 우리는 지금 기억하고 있는가?

이 모든 변화의 중심에 교회가 있었으며, 하나님 나라가 있었다. 

기독교 국가도 아닌 이 나라의 첫 국회가 기도로 시작된 것만 보아도, 이 나라에서 교회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수 있게 된다. 


교회는 복을 받는 곳이 아닌 죄사함을 받는 곳이다. 


최근 한국교회가 빠른 속도로 쇠퇴하고 있다고 말한다. 2000년대를 지나면서 조금씩 나오던 이야기가 2010년을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다. 가나안 성도가 100만이 넘는다는 통계도 있다. 유럽교회의 쇠퇴보다 몇배나 빠른 위험징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문제를 심각하게 보아야 하는 것은, 미국과 유럽은 쇠퇴하였지만 역사적 저력이 남아있다. 신앙의 유산이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짧은 기독교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교회역사의 2000년의 시간으로 본다면 우리나라의 부흥은 반짝이는 잠시일 뿐이다. 

한때 세계적인 대형교회들의 대부분이 한국에 있다는 이유로 세계교회는 찬사를 보냈다. 한국교회의 성령운동을 배워야한다는 기류도 있었다. 

한국에만 있는 ‘새벽기도’와 ‘금요철야’와 같은 기도운동이 다른나라에 전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왜 그런 한국교회가 이렇게 빠르게 무너지고 있는가?


예수님은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다. 그런데 어느순간 교회는 죄사함에 관심을 잃어 가고 있다. 

‘복’을 받는 장소가 되었다. 그런데 나라가 잘 살게 되면서 ‘복’에 대한 관심도 식어 버렸다. ‘죄사함’의 은혜를 싸구려 ‘복’으로 대체해버린 우리는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지고, 인문학적이고,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설교가 인기를 끌고 있다. 

연세가 많은 분들은 여전히 ‘복’받기 위해서, 자녀가 잘되기 위해서, 아무런 어려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기복신앙이 강하고, 젊은 

세대들은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설교를 통해 마음의 쉼을 얻기를 원한다. 정치적인 이념으로 교회가 나뉘어지는 이 웃기는 모습이 지금의 교회다. 

설교에서 ‘죄사함’과 ‘십자가’의 이야기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용서보다는 법이 더 적절한.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부어주신 은혜와 복은, 철저한 회개를 통해 주어진 것임에도 어느순간 교회는 ‘회개’를 놓아버렸다. 성공한 사람들이 

좋은 신앙의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런 교회에서는, 삶에 여유가 없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구원’은 멀기만 하다. 

교회는 성공한 사람들을 항존직분자의 자리에 앉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오시기전의 시대로 회귀를 의미한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많은 유대인들은 병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성공한 자들은 하나님께 축복을 받은 이들로, 신앙의 검증이 

끝난 사람들도 인정을 했다. 성공은 ‘의’가 되어고, 가난은 ‘죄’가 되었다. 그렇기에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예수님을 ‘의’로 ‘메시아’로 받아들일수가 

없었다. 


지금 교회의 모습이 그러하지 않는가? 복음은 무엇인가?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그가 십자가에 죽음심으로 그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임을 믿는 이들은 죄에서 자유함을 얻으며 구원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 복음 어디에 ‘성공’과 ‘복’이 자리잡고 있는가? 우리의 참된 복은 ‘죄사함’이다. 세상의 것은 자신의 노력으로도 얻을수 있으며, 하나님의 약속으로 

받을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모든 복을 하나님에게만 받는 것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다.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세상의 복을 받을수 있다. 

그 복은 세상에 주는 것이며, 세상의 방법으로 얻는 것이다. 세상에서, 세상의 방법으로 받은 복을 마치 하나님께 받은 것처럼 말하며, 그것이 자신의 

믿음의 증명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이 주신 복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생명을 살리며,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며, 복음이 전해지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다. 세상의 방법으로 

받은 복이 교회에 자리잡으면 교회는 세상과 별반 다를게 없게 된다. 


200여명 모이는 지방의 한 교회의 목사님이 십여년간 목회를 내려놓고 사임을 하였다. 

우연히 대화를 할 기회가 생겼는데, 그 목사님이 가장 어려움을 느낀 것은 한 분의 항존직분자로 인해서 였다. 그 분은 성공한 사업가였다. 

자산이 몇백억이 되는 분이셨는데, 교회의 모든 일을 자신의 뜻대로 하려고 했다. 목회자에게도 자신의 십일조로 목사님이 생활하는 것이라고 

둘러서 말을 했다고 한다. 그 교회에 청년부가 부흥하고 있었다. 담당 교역자가 청년부의 일년예산을 5%정도를 올려달라고 요청을  했는데, 한사코 

반대를 하셨다. 돈으로 목회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음으로 하는것이라고. 

자신은 억단위가 넘는 자가용을 타고, 20대 초반의 자년에게 중형세단을 뽑아주며 한달용돈으로 몇 백만원을 쓰면서, 한 부서가 성장하여 필요한 

재정을 요청하는 것을 결국 혼자 반대하고 막았다. 

교인중에 그 분의 회사 직원 가정이 10가정 정도가 되었고, 다른 두분의 장로님중 한분이 그 회사의 직원이였다. 목사님은 스스로의 목회자로 자질이 

부족하다고 말씀하셨지만, 그 교회는 죄사함과 하나님의 나라가 있어야 하는 자리에 성공한 사람이 자리잡고 있었다.  


‘복’은 내가 누리는 것이며, ‘거듭남’은 내가 바뀌는 것이다. ‘복’은 환경의 변화이며, ‘거듭남’은 내 삶의 변화이다. 복에 매이면 올바른 기도가 사라진다. 

기도는 얼마지나지 않아 불평과 불만이 된다. 

성경은 정욕을 위해서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듣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죄사함’과 ‘거듭남’이 사라진 기도는 죄가 번성하기에 좋은 환경이 된다. ‘사단’을 교회를 없애지 않는다. 교회는 없앨 수 없다. 사단의 최선의 방법은 

교회를 타락시키는 것이다. 

‘아담’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타락시킨것처럼, 교회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사단의 최선은 타락시키고 변질시키는 것이다. 교회가 구원의 통로가 되지 

않는다면, 사단이 이긴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였다. 그들은 송아지를 만들고 뭐하고 하는가?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출애굽기32장4절 


출애굽 사건도 인정한다. 하나님이 이끄심도 인정한다. 그런데 그것이 ‘송아지’라고 말한다. 

이것이 사단의 방법이다. 교회에 모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배드린다. 찬양도 한다. 감정적인 은혜도 체험한다. 그런데 ‘죄사람’과 ‘거듭남’의 결단이 

없다. 용서는 사라지고, 그냥 속이 후련하고 시원하고, 뭔가 잘 될 것 같다. 거기서 멈춰버렸다. 


사단은 결단없는 기도를 좋아하고, 거듭남이 없는 은혜를 좋아한다. 


사단이 우리에게 불어넣어주는 포장된 은혜를 조심하자. 하나님은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자녀를 사랑하시는 분이며 축복하시는 분이다. 

우리는 먼저 자녀가 되어야 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자녀되는 것에 관심이 없고, 예배드리는것에 관심이 없고, 축복과 성공이 머리에 가득차있다면 먼저 나의 믿음의 자리를 확인해 봐야 한다. 

나는 자녀인가? 나는 그리스도인 인가?


목적과 목표가 바뀌어 버리면 교회가 아니다. 


오랜시간 신앙생활을 했고, 나름 열심히 봉사도 하고 있는데 공허함을 느낀다면, 내 삶의 목적과 목표를 점검해보자. 

구원의 은혜를 여전히 사모하고 있는가?

나의 믿음은 죄사함을 마음에 새기고 있는가?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비유중에 가장 많은 것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천국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는데, 우리는 땅의 복에 머물러 있다. 

우리의 믿음이 ‘무속신앙’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는가?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믿음으로 결단하고 제거하였던 그 무속신앙으로 다시 돌아와 있지 않은가?

지금 닥친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더 잘되는 방법은 무엇인지? 기적이 일어나 내 삶이 바뀌었으면 좋겠다든지, 기도가 이러한 문제에 

머물러 있다면 먼저 죄사함의 권세가 예수님께 있음을 기억하라.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 ‘죄사함’과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네 죄사함을 받았다.”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질병은 죄의 댓가이다. 특히나 겉으로 드러나는 

병은 큰 죄의 댓가였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표시하신 것이다. 

당연히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질병이 낫는 것이 맞다. 하지만 예수님을 싫어하는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징표’가 아닌 ‘사단의 권세’로 

포장하고자 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내게 있는 권세는 죄사함의 권세이다. 

병을 치료하는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사함의 문제였다. 

예수님은 질병을 그 사람의 죄로 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렇게 생각하고 이미 그렇게 받아들인 그들에게 예수님은 죄사함의 권세가 자신에게 

있음을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이중성과 그들의 영적인 교만을 지적하셨다. 사람들은 여전히 죄사함과 거듭남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고 미혹된다.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한 우리의 약함을 경고 하신다. 마지막 때에 거짓 선지자와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면, 그들은 

‘병고침’과 ‘성공’과 ‘축복’으로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을 것이다. 

그들은 기적을 행한다. 적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붙을만큼 대단한 일을 할 것이다. 

하지만 거짓이 절대로 흉내낼수 없는 것은 바로 ‘죄사함’과 ‘거듭남’이다. 


교회는 죄사함과 거듭남을 회복해야 다시 살아날 수 있다. 


하나님을 잘 모르는 이들은 복을 받기 위해 교회를 찾을수 있다. 그들이 신을 찾는 이유는 대부분이 당면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교회에서  죄사함을 경험해야 한다. 

이미 하나님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해야 한다. 

1차원적인 복의 문제를 벗어나 영적인 문제를 볼수 있게 되어야 하며, 기도의 깊이를 경험해야 한다. 

세워진 리더들조차 성공만을 기대하고 바라고 있다면, 그것만을 즐거워하고 기뻐한다면 교회가 될 수가 없다. 

사람들이 죄사함을 위해 교회를 떠올리게 될 때에 교회는 교회가 된다. 

인생을 살다가 세상의 모든 것이 허무함을 알게 되고, 죄를 알게 되고, 영적인 갈급함을 느낄 때 생각나고 떠오르는 곳이 교회가 되어야 한다. 

말씀과 찬양교회가 그런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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