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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마가복음을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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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태환목사 작성일 21-05-18 16:51 조회 1,30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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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교회는 오래동안 출석을 했지만 도무지 말씀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집사님이 계셨다. 믿고자 하는 마음도 있지만, 예배가 그의 삶에 큰 의미가 없었다. 마음의 위안을 얻는 정도라고 하셨다. 스스로에게 고민이 된다고 상담을 신청하셨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희미해진다. 결심과 다짐도, 그리고 지나간 잘못도 그렇다. 과거의 잘못을 스스로 용서하고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드러나지 않은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모두에게 있다. 어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믿음이 단단해 지지만 어떤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흐릿해진다. 


열정적으로 신앙하시는 분들이 있다. 목사가 봐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직장을 다니고 자녀를 양육하는 중에도 기도의 자리를 지키고, 섬김의 자리를 지키시는 분들이 있다. 

열정적인 분들의 특징은 ‘기도의 사람’이다. 교회든 자신의 가정이든 기도를 하시는 분들이다.  

시간은 우리의 감정과 기억을 무디게 만든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도 하지만 모두에게 그렇지는 않다. 슬픈기억도 기쁜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무뎌진다. 잊어야 할 것은 자연스럽게 두면 되지만 잊으면 안되는 것은 늘 새롭게 기억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절기를 주신이유는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다. 

출애굽 사건을 한해의 시작으로 정하신것도 매년 하나님은 은혜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은혜를 잊으면 믿음이 사라진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생활은 하나님의 절기를 잊은 것이 중요한 이유였다. 단순히 절기를 잊은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잊은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은혜가 늘 기억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잊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은 그 은혜를 다시 채우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잔에 채워둔 물은 그냥 두어도 며칠이 지나면 사라져 버린다. 죄의 무서운 점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합리화되고 때로는 재해석이 되어서 정당화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그러한 일들을 종종 목격한다. 지워지고 잊어진다고 해서 죄가 해결되 것은 아니다. 죄는 여전히 우리의 생각 어딘가에 남아있어서 또다른 죄로 드러나게 되어있다. 

죄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회개이다. 그 외에는 없다. 이것이 믿음의 시작점이 된다.

회개만이 죄의 고리를 끊게 된다. 다른 방법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어느 순간 동일한 죄가 내 삶에 들어와 있다.   


베드로후서 2:22 “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죄임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는다는 것이 반드시 교회와 멀어지는 것 을 말하지는 않는다. 변질되는 것이다. 

성경말씀은 그저 좋은 말씀이며, 예수님의 가르침은 뛰어난 성현의 가르침이 될뿐이다. 이런 신앙은 계시록이 말하는 ‘미지근한’신앙의 자세이다. 뛰어난 교훈이지만 그 말씀이 내 삶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영적인 갈급함을 채워주는 가르침일뿐이다. 교회를 떠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 가르침이 나름 살아가는데 유익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스리고 때로는 위로가 된다. 하지만 성도의 삶이 되지는 않는다. 


“회개는 첫 걸음이지만 달음질의 시작이 된다.”


사도바울의 신앙을 보면, 다윗의 신앙을 보면 회개가 늘 고백되어진다.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할때에 회개는 반드시 동반된다. 그리고 그 회개는 철저하다.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말한다.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자신이 죄인중에 괴수임을 고백하면서, 한편으로는 ‘사도’로 부르심에 당당하다. 

참된 회개는 용서받은 자의 모습을 가지게 한다. 온전한 성도의 삶은 죄가 내 삶의 모든 부분에 여전히 사라지지않음을 아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안에 있을때에 죄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힘을써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잡아야 한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만으로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 동행하시는 분이다. 그 분의 힘으로 산다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나의 회개가 내 삶에서 고백되어질 때, 우리의 힘으로 할수 없는 일을 할수 있는 성도가 된다. 


사도행전을 시작으로 사도들의 행적에 늘 등장하는 문구가 있다. 바로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함이다. 

예수님을 3년간이나 따랐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사도로서의 권위를 가졌지만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예수의 이름’이다. 아니 그들의 믿음이 장성한 분량에 이르렀기에, 자신의 힘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알게 된 것이다. 

회개는 연약한 나의 힘에 예수그리스도의 은혜가 덧입혀 지는 것이다. 회개 없이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임재를 경험할수 없다. 회개가 사라지면 억눌렸던 죄가 다시 힘을 발휘하게 되며, 우리의 삶은 말씀을 떠나게 되며, 때로는 교회는 다니지만 말씀의 은혜가 없는 상태가 된다. 


“회개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된다.”


지식적인 복음은 언젠가는 우리를 교회로부터 떠나게 한다. 지식은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지식이 회개를 경험하지 않으면, 아니 우리의 지식이 회개를 향하지 않으면 죽은 지식이 된다. 

지식은 여러 종류가 있다. 아는 지식이 있고, 경험되어지는 지식이 있으며, 죽은 지식이 있다. 

경험되는 지식은 삶을 바꾼다. 

한 집사님이 계셨다. 그 분은 동물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아끼시는 분이였다. 그래서 길고양이들의 음식을 챙겨주시기도 하고, 티비를 통해서 동물학대의 뉴스가 나오면 분노하기도 하셨다. 하지만 그 정도였다. 그런데 우연히 동물보호소의 일을 도울 기회가 있어서 3일간 봉사를 하셨다. 그 3일이 그분의 삶을 바꾸었다. 버려진 동물들과 학대받은 동물들의 참상과 그럼에도 자신들을 돌보는 사람의 손길을 그리워하는 동물들을 경험하면서, 아예 봉사자로서의 삶을 택하셨다. 알고는 있었지만 경험은 그분의 삶을 바꾸어 버렸다. 


믿음에 있어서 지식이 경험이 되는 것은 정말 어렵다. 그 이유는 대부분 자신의 믿음이 지식적이라는것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때의 체험과 한 때의 경험을 붙잡고 평생을 사는 이들이 많다. 

경험은 오늘의 문제이며, 지금의 문제이다. 


오늘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첫 선포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복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회개이다. 지식적인 신앙에서 경험되어지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회개이며, 회개는 성령의 임재의 통로가 된다. 

성경이 내게 말씀인가? 아니면 이야기나 교훈인가? 회개가 없으면 윤리적인 교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말씀을 교훈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 오히려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들이 있다. 적당한 교훈은 부담이 없지만 거듭남의 삶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있다. 예수님은 분명히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오래전 미국의 교회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으로 믿지 않는다는 이들이 꽤나 많았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믿지만, 부활은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는 타락하기 전에 변질된다. 진리가 변하게 된다. 

교회는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버려지고 밟힌다고 하셨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스스로 소금에 물을 태우고 사람들에게 먹기좋은 음료를 만들려고 한다. 복음을 전하기위한 방법으로, 혹은 이해를 돕기 위한 방법으로 외부적으로 사용된다면 허용될수 있을지 모르겠다. 

문제는 복음자체에 물을 태우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복음을 접하는 과정에서 살짝 짠 맛을 본 사람들이 교회에 왔을 때, 제대로 짠맛을 봐야 하는데 교회가 더 맹탕이라면, 진짜 소금이 없다면, 빛이 없다면, 오히려 과정에서 맛본 것이 전부라면 교회는 무너지고 버려지게 될 것이다. 

소금이 소금되고 빛이 눈부시게 빛날 수 있는 것이 회개의 신앙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경험될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종종 교회는 죄인이 모여있으니 별반 다를게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맞는 말인 듯 하지만 그 말이 그 상태로 머물로 있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교회안에는 아직 변화되지 못한 이들도 있지만, 거듭난 이들이 믿음의 본을 보여 변화를 향한 방향성이 분명히 느껴져야 한다. 

그 방향성이 있어야 교만이 힘을 발하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통용될 것이다. 

예수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내 삶이 고백되어지는 것이 교회가 되어야 한다. 


개척을 시작하고 지난날들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시간을 가질때가 많다. 개인적인 부족함과 연약함들, 젊은 혈기로 살았던 지난 시간들, 화려하고 성공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과오들이 내게 회개의 제목이 된다. 어떤날은 잠자리에 들었다가 일어나서 십여년전의 일을 떠올리며 회개한다. 


그때는 왜 그런 목표를 가졌을까?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회개는 지금 나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한다. 더이상 성공도 실패도 의미가 없다.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 가시는 삶이면 족하다. 자랑할 것도 드러낼 것도 없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내가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은 나를 붙잡고 계셨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이제야 깨달아 알게 된다. 회개하지 못한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하셨고, 회개의 기회를 주셨다. 

하나님의 은혜는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은혜가 아닌 다시 기회를 허락하여 주시는 것이다. 


목사라도 회개를 잃고 지식에 머물게 되면 짠맛을 잃게 된다. 한국교회의 절대적인 문제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자신이 한 일로 생각하는 지도자들의 문제이다. 권위주의적이고 긍휼을 잃은 지도자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있음을 기억하지 못한다. 성도들은 목사의 심방을 기다리는데, 목사들은 정치적인 일에 메이거나, 지극히 개인적인 삶을 누리며 살려고 한다. 

목회는 거룩한 직업인데, 거룩함 안에 들어있는 은혜를 잃어 버리고, 스스로 가지지 않은 거룩함을 내세워 개인의 즐거움과 혹은 성공한 사람들과의 어울림에 빠져서 목회를 잃어 버리는 이들이 많다. 

한국교회를 이끌어 오셨던 앞선 목회자들의 헌신은 사라지고, 그 분들의 헌신의 열매를 먹는 목사들이 마치 자신이 성공의 주인공인 듯 누리며 살고 있다. 

좋은 자가용에 넓은 집에 부유한 취미생활을 즐기며 그것이 복받은 리더의 모습인양 당연시하는 것을 볼 때에 안타까움이 더 한다. 


고린도후서6장8-10절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한국교회를 이끌어 오신 많은 목사님들과 장로님들, 기도의 권사님들 집사님들은 믿음의 본이 되었다. 

가난과 치열하게 살면서도 더 가난한 성도들을 섬겼고, 헌신적이였다. 

구두밑창이 헐도록 심방을 하시고 기도하러 다니셨던 분들. 교인이 수천 수만이 되어도 검소함을 잃지 않으셨다. 목회의 끝에 변질된 이들도 있지만 끝까지 묵묵히 믿음의 걸음을 걸어가신 분들이 있다. 

지금 한국교회의 물질만능주의를 예수님은 기뻐하실까? 

예수님이 어린나귀를 탈 형편밖에 되지 않아서 나귀를 타신것일까?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지도자들은 사도의 삶을 배워야 할것이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가난한 성도들의 눈에 비친 목회자의 모습이 ‘성공한 사업가’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면, 그들은 무슨 자격으로 나귀를 타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선포하는가?

억지로 가난하게 살필요는 없지만, 성공지향적인 삶의 자세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지식적인 회개는 더 큰 문제다.” 


회개는 복음의 시작이지만 이 회개조차 지식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형식적인 회개는 요지부동의 고집스러운 믿음이 된다. 

목회를 하다보면 기도를 많이하는 성도들중에 의외로 문제를 일으키는 이들이 많은 것을 본다. 그리고 그런 성도들은 다른 사람에게 더 큰 상처를 준다. 더 심각한 문제는 “기도해도 별수 없구나.”라는 기도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준다. 즉 다른 사람의 기도를 막게 된다. 


마태복음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예수님의 가르침중에 특이한 것이 있다. 위의 말씀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기도를 하지말라는 말이 아니다. ‘골방’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온전한 회개의 기도이다. 남들앞에서 말하지 못하는 모든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기도의 사람에게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형식적인 기도를 하는 사람에게는 장소가 중요하다. 

공개적인 장소의 기도와 골방에서의 기도는 참된 믿음의 호흡이 된다. 


오래전 목회하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주중에 교회에 교인이 아닌 낯선분이 찾아오셨다. 교회 사무실로 들어오셔서 대뜸 

“이 교회에 000 이라는 사람이 다니는게 맞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이 교회 권사라고 하던데 맞냐?”라고 물으셨다. 내가 맡은 교구는 아니지만 최근에 다른 곳으로 이사한 권사님이셨다. 주중에 와서 교회에서 기도도 나름 열심히 하시는 분이지만, 젊은 집사님들에게 툭툭 던지는 말로 꽤나 상처를 주는 분이셨다. 다들 그러려니 생각하고 함께 일하기를 꺼리는 권사님이였다. 하지만 큰 문제를 일으킨적은 없었다. 그런데 찾아오신 분이 하시는 말씀이 이랬다. 

“그 여자가 우리 아파트 동장이였는데, 10여년간 공용전기를 집에 끌어다 쓰고, 아파트 주민이 낸 공공재정으로 자신의 집을 수리하고는 들키자 거짓말을 하고는 장부도 주지않고 야밤에 이사를 가버렸다.”는 것이다. 아파트 사람들은 분노했고 현관문에 붙은 교회 스티커를 보고 찾아왔다는 것이다. 

기도와 삶이 분리되고, 기도와 예배와 찬양이 지식이나 감정적이 될 때에 복음을 막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감정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이다. 우리는 슬퍼하고 기뻐함으로 사람들과 소통한다. 

감정은 서로를 신뢰하게 하고, 참된 회개의 눈물은 우리의 삶을 바꾼다. 하지만 감정에서 머물러 버리게 되면, 기도중에 흘린 눈물이 내 삶에서는 기억되지 않는다. 

참된 회개를 가로막는 것은 머리와 가슴에 머물러 버리고, 삶의 변화를 두려워하는 우리의 주저함이다. 

거듭나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수 있는 것이며, 회개외에는 없다. 


나의 믿음을 돌아보자. 오늘 나는 회개 하였는가? 지금 은혜안에 있는가?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원이 되심을 믿는가? 나는 자랑할것이 없는 사람인가? 나의 자랑이 사라지면 나는 분노하는 사람이 아닌가?


오늘 회개의 영이 나를 붙들어 주시기를 기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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